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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이야기

프랑스 혁명

by 캐리나 2021. 4.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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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 1789년 7월 14~ 1794년 7월 28일에 일어난 프랑스의 시민혁명.

 

프랑스 혁명은 전형적인 시민 혁명 입니다. 전 국민이 자유와 개인으로서의 평등한 권리를 위해 일어난 혁명 입니다. 루소의 문명 비판과 인민주권론이 혁명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프랑스의 왕권은 루이 14세가 완성한 절대주의의 체제에 의해 신권이론(신에게 받은신성한 권력)을 바탕으로 군림 하였습니다.이런 신권이론 밑에서 모든 국민은 그저 왕의 노예에 불과했습니다. 왕은 국민의 90%의 세금을 받아 흥청망청 우아한 삶을 살았습니다.

 

한편 루이 16세의 정부는 미국 독립혁명에 군사비를 지원하여 재정궁핍에 시달렸습니다. 그러자 재정총감 칼론은 명사회(왕족, 귀족, 성직자, 시대표등 왕이 지명하여 조직한 기관)를 소집하여 우리 특권 신분을 가진 사람들도 세금을 내자는 임시지조를 제안하였습니다. 

 

하지만 가만히 있을 명사회가 아니었죠. 이에 대항하여 귀족과 성직자들은 파리 고등법원과 몰래 일을 꾸며 심사 권한을 나쁘게 이용하여 재정안에 반대 하였습니다.

 

이렇게 왕권 내부에서 싸우는 동안 칼론과 그의 후임자 브리엔이 자리에서 물러나고 1788년 네케르가 다시 재정총감으로 올라오게 됐습니다. 네케르는 고등법원의 요구를 받아들이며 삼부회를 약속 하였습니다.

 

삼부회 (전국 삼부회)

1302년 필리프 4세가 노트르담 성당에서 소스 특권층(귀족, 시대표, 사제등)을 모아놓고 개최 하였습니다. 왕권의 주도로 국민 협력을 요청하는 자문 기관 입니다. 그뒤 제1부는 사제, 제2부는 귀족, 제2부는 평민의 대표들로 구성되었습니다.

 

이 의회의 소집권과 이의제기권등 모든 권력은 왕에 있었고, 의원들에게 결정권은 없었습니다. 

 

백년전쟁 중인 어느 날 1356년 내부에서는 평민들과 귀족들의 의견 대립이 자주 일어났습니다. 16세기 후반에는 삼부회의 소집이 점점 줄어 들었으며 1562년 종교전쟁이후 신앙문제로 대립이 더욱 심화 되었습니다. 귀족들의 특권 위주로 회의가 돌아가고 관직을 귀족들에게도 나누기 위해 매관제 폐지까지 논의하며 대립을 이어갔습니다. 하지만 이 삼부회를 마지막으로 170년동안 한번도 소집이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대망의 1789년 루이 16세가 재정문제로 귀족들을 다시 삼부회에 소집하였고 대립은 점점 더 깊어졌습니다. 결국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고 이 신분제 회의인 전국 삼부회는 영영 폐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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