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식 군대가 일으킨 병란, 임오군란 배경
떄는 1876년(고종13)에 맺어진 강화도 조약(한,일 수호조약)으로 대원군의 쇄국정책이 무너지고, 개화파와 수구파의 대립이 날카로웠습니다. 개화파의 관료제도 개혁에 따라 대거 등장해 수구파의 반발이 격화되었습니다. 임오군란이 일어나기 전에도 군병들의 반란은 수 차례 있었습니다.
1863년(철종14) 금위영 소속의 군병의 소란, 1877년 8월의 훈국병의 소란들은 모두 군료로 인해 일어난 사건이었습니다. 이 밖에도 민씨 친족정권의 인사행정 문란, 매관매직, 관료층의 부정 부패 및 국고의 낭비, 일본의 경제적 침략등 불만이 점점 쌓여갔습니다. 군졸들은 무려 13달 동안 봉급을 받지 못하였고 그나마 한 달치 급료를 받았으나 그마저 섞인 모래가 반이 넘었다고 합니다. 이에 결국 구식군졸들이 격분하여 고지기를 때려 부상을 입히고 선혜청의 당상 민겸호를 찾아가 자택을 부수고 폭동을 일으켰습니다.
임오군란 명성황후
사태가 심각하게 돌아가자 난병들은 대원군에게 진정하게 하기 위해 운헌궁에 몰려와 하소연 하였습니다. 대원군은 일단 난병들을 어르고 달랬지만, 한편으로는 허욱을 시켜 그들을 지휘하게 하였습니다. 군민들의 불평은 점점 커졌고, 민씨와 일본 세력의 배척운동으로 커졌습니다. 군민들은 병명으로 몰려가 일본인 교련관인 호리모토 소위를 죽이고, 민중들과 합세하여 일본 공사관을 불지르고 일본 순사 13명을 살해하였습니다. 하지만 일본 공관원들은 모두 인천으로 도망가 영국의 배를 타고 본국으로 도망갔다고 합니다.
더욱더 강력해진 군민들은 대원군의 비밀 스러운 명령을 받들고 영돈령부사 이최응을 살해하고 명성황후를 제거하기위해 창덕궁 돈화문 안으로 난입하였습니다. 하지만 명성황후는 이미 궁녀의 옷으로 변장한 후 궁궐을 탈출해 충주목사 민응식의 집으로 피신해 있었습니다. 사태가 좋지 않게 흘러가는 것을 안 고종은 대원군에게 수습할 것을 명령하였습니다. 이렇게 왕명으로 정권을 잡게 된 대원군은 반란을 일으키고 군제를 개편하는 등 뒷수습해 나섰지만 민씨일파의 청원으로 청나라에서 군대를 판견해주어 재집권은 얼마가지 못했습니다.
결과
청나라는 이 난의 책임을 대원군에게 물어 텐진으로 납치해 갔습니다. 일본은 조선정부에 위협을 가하여 손해배상 청구를 하였으며 제물포조약을 맺게 하였습니다. 결과적으로 군변으로 시작 된 이난은 일본과 청나라에게 조선의 권력을 쥐락펴락 하게 해주는 계기가 되었고 대내적으로 개화세력과 보수세력을 갈등을 일으켜 갑신정변의 배경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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